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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제자의 날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하늘과 땅이 그렇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때로 반대말이나 반의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반대라는 말이 주는 무게가 서로를 밀어내는 듯합니다. 상대 또는 짝이라는 표현이 좋겠습니다. 서로 짝을 이루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교실에서도 짝이 있었는데 점점 혼자 앉는 책상으로 바뀌어 갑니다.    지금은 어버이날이지만 예전에는 어머니날이었습니다. 어머니날만 있고, 아버지날이 없다고 하여 어버이날로 바뀌었습니다.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는 어머니날도 있고, 아버지날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어버이날이 있는 것이 오히려 특이한 것 같습니다. 외국인에게 물어보면 자기 나라에서는 어머니날은 중요한데 아버지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나라에 어버이날이 있는 것은 다행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덩달아 대우를 받는 나라입니다.    한편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스승의 날 때문입니다. 스승의 날은 좋은 날입니다. 제가 선생이어서도 그러하지만, 스승께 고마움을 표할 수 있는 날이 있음은 다행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생인 저의 입장에서는 늘 부끄럽고 어색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스승의 날이 있다면 ‘제자의 날’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물론 ‘학생의 날’이 있지 않은가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학생의 날은 제자의 날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교사의 날의 반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승의 날에 스승을 찾고 기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찾아뵙거나 인사를 드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정말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께 묻고 싶습니다. 정말 스승이 있습니까? 스승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러운 사람이지요.      저는 제자의 날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스승이 되기도 힘들지만 사실은 제자가 되기도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옛 사극을 보면 제자로 받아들여주기를 간청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수업료 내고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스승의 인정이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기독교 성경에서 예수의 제자는 열두 명입니다. 더 많은 이가 예수님을 따르고 제자가 되기를 원했겠지만 제자는 한정적입니다. 공자의 제자도, 부처의 제자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스승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자의 의미를 살펴보면 저 사람은 내 제자라고 말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자의 뜻을 보면 ‘덕 있는 사람에게 배우는 이’라고 하는 정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스승이 덕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이 내 제자라고 함부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누구의 스승이 되고 싶다면, 덕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의 날이 있다면, 스승의 날처럼 제자에게도 기쁘면서도 부끄러운 날이 될 겁니다. 누가 나를 제자라고 생각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죠. 하지만 자신의 그릇을 생각하면 두렵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스승은 찾으면 되지만, 제자는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막상 제자의 날에 고마운 제자가 없다고 부끄러워하는 선생님도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스승의 날이나 제자의 날이나 모두 귀한 날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제자 제자도 부처 자기 나라 기독교 성경

2025-05-18

[아름다운 우리말] 평화의 언어 한국어

 언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어가 없었다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었을 겁니다. 몸짓만 남아있었겠죠. 소통은 다툼을 막기 위한 행위입니다. 당연히 언어는 평화의 도구입니다. 언어가 때로 다툼의 원인이 되고, 상처의 칼날이 되기도 하지만 이는 옳지 않은 사용법입니다. 언어는 싸우지 말자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로 하자는 말이 주먹으로 싸우지 말자는 뜻이 됩니다. 우리 모두 말로 합시다.    많은 종교에서는 말이 평화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경전에서 말이라는 표현을 평화로 바꾸어 보면 뜻밖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세상이 달라집니다.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표현일 겁니다. 이 말은 달리하면 태초에 평화가 있었던 것이죠. 상상해 보세요. 천국의 풍경을. 생각만 해도 태초는 편안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낙원이라는 말로 표현했겠지요. 서로 싸우지 않으면 낙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낙원에서 나온 후 일어나는 일은 다툼입니다. 시기입니다. 질투입니다. 도대체 잘못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말로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힘으로 처리합니다. 그러니까 일어나는 일이 끔찍한 살인입니다. 기독교 성경에서도 낙원 다음 장면에서 곧바로 살인이 일어납니다. 그것도 형제간에 말입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사람들이 형제를 죽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는 겁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가장 끔찍한 일인 형제를 죽인 이를 용서합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죽인 사람을 용서합니다. 저는 용서의 지극한 가치를 여기에서 봅니다. 어쩌면 성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 부분에서 설명이 가능한 것 같기도 합니다. 평화롭게 서로 아끼며 살면 그대로 천국입니다. 유혹에 넘어가고 시기, 질투하고 서로를 해치면 그대로 지옥이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 뉘우치고 서로를 용서하면 다시 금방 천국이 되는 겁니다. 물론 회개와 용서가 가장 어려운 덕목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말로 하되, 소통의 말을 해야 합니다. 말로 하되 통하는 말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말로 했는데도 통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싸웁니다. 말이 안 통한다고 하는 말은 싸우자는 말이 됩니다. 다툼은 뿔뿔이 흩어짐을 낳습니다. 성경에서 바벨탑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같은 말을 한다고 해도 진리를 배반하며 어긋나게 사는 사람에게서는 소통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소통은 나만을 위하는 게 아닙니다. 서로를 위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진리를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평화입니다.    저는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한국어가 소통의 도구가 되기 바랍니다. 한국어가 평화의 도구가 되기 바랍니다. 한국어가 전쟁의 도구가 되거나 미움의 도구로 쓰이지 않기 바라는 것입니다. 한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마음도 같을 겁니다.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마음은 다 똑같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일 겁니다.   얼마 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전쟁은 참혹한 다툼을 보여줍니다. 전쟁은 말로 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가장 비참한 장면입니다. 뉴스를 보는데 우크라이나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의 모습이 나옵니다. 한국어로 이야기합니다. 무섭다고, 평화를 원한다고, 전쟁이 끝나기를 바란다고 한국어로 이야기합니다. 한국어가 평화의 도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어서 평화의 시간이 되돌아오기를 소망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 평화 언어 한국어 바벨탑 이야기 기독교 성경

2022-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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